<목민심서(牧民心書)>는 조선 순조(純祖) 18년(서기 1818년) 정약용(丁若鏞) 할아버지께서 전남 강진(康津)의 유배지에서 저술한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영조(英祖) 38년(서기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에서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미용 또는 송보라 했으며, 호는 삼미․다산․사암․자하도인․�수․문암일인 등이며 당호를 여유당이라 했다.
소년시절부터 아버지가 목민관을 지냈으므로 연천․화순․예천․울산․진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백성을 다스리는 법과 수령으로서의 몸가짐을 보고 배웠으며, 벼슬길에 오른 후에는 경기암행어사․금정찰방․곡산도호부사 등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혜안으로 민정을 살피게 되고 지방행정제도의 모순과 수령들의 무능과 아전들의 횡포를 체험하고 목도하게 됨으로써 크게 느낀 바가 있어 <목민심서>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형제들이 일찍이 천주교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순조 11년(서기 1801년)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체포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는데 순조 18년 방면될 때까지 무려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 시기야말로 할아버지로 하여금 <목민심서>를 비롯해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 이른바 <여유당전서>라는 대저서를 낳게 한 절호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벼슬길에서 물러나 죄인의 몸으로 18년이란 긴 세월을 천리타향에서 쓰라린 고난을 겪어야 했으나 이 방대한 저술을 통한 교훈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머릿속에 참신한 기풍을 불어넣었으며 고루한 사조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진로를 제시하였으니 선생은 우리 나라 반만년 역사를 통하여 석학에 속할 뿐만 아니라 그의 실사구시를 부르짖는 실학이야말로 길이 우리의 앞날에 등대가 될 것이다.
국가가 존립하고 정치가 행하여지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국민들을 잘살게 하는 데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니 만일 국민이 못살게 된다면 국가나 정치는 곧 가치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국민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정치란 바로 일선의 지방행정이며 행정담당자인 목민관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개개의 원활한 지방행정이 집약됨으로써 온 국민이 잘살게 되는 것이며 한 나라가 번영을 누리게 되는 것이니 목민관의 책임이야말로 참으로 무겁고 큰 것이다.
<목민심서>는 1. 부임, 2. 율기, 3. 봉공, 4. 애민, 5. 이전, 6. 호전, 7. 예전, 8. 병전, 9. 형전, 10. 공전, 11. 진황, 12. 해관의 12강으로 대분되고 이것을 또다시 각각 6조씩 세분하여 전체가 12강 72조로 되어 있으니 당시에 있어서 목민관의 생활을 총망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율기편에서는 위엄과 신의로써 관속을 통솔하며 염결과 공정이라는 이도정신에 입각하여 정사에 임할 것을 제시하고 있으니 목민관은 행정에 임하기에 앞서 몸가짐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전에서도 관속을 통솔하는 근본은 무엇보다도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데에 있음을 거듭 천명하고 있으니 목민관의 올바른 정신자세야말로 밝은 행정의 원천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아전들의 유혹에 빠져서 한 번 부정을 저지르게 되면 수령 노릇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예로 들어서 목민관들에게 일대 경종을 울리고 있다.
호전에서는 토지의 소출을 기준으로 하는 전제를 비판하고 면적을 기준으로 하는 중국식의 경무제를 찬양하였으며 전제의 실질적인 개혁만이 세제를 확립시킴으로써 백성들의 부세를 공정하게 하는 한편 국가재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부임으로부터 해관에 이르기까지 전문을 통하여 목민관은 오직 국민을 사랑하고 나라의 일을 염려하여 관속들의 횡포와 부정을 막고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방법론을 펴고 있으며, 국가 법전을 고증하고 우리 나라 역대로부터 이름높았던 수령들의 선치는 물론 중국의 유명했던 목민관의 치적까지도 실례로 들어서 보충설명을 하고 있다. 선생은 애민우국하는 충정에서 오랜 관찰과 연구 끝에 이와 같은 대저술을 이룩하였으나 오직 당쟁과 개인의 영달에만 급급했던 당시 인사들의 안중에는 없었다. 선생의 소기의 목적은 비록 성취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후세 사람들을 하여금 당시의 정치제도는 물론 사회상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소상하게 알 수 있도록 만들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까지도 낱낱이 엿볼 수 있게 하였으니, 우리의 과거를 아는데 그 기여하는 바가 실로 큰 것이다.
과거를 아는 것은 곧 현재를 점치는 데 있어서 유일한 자료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우리의 현실을 비판하며 미래를 추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아무리 시대가 별하고 제도가 달라졌다하더라도 대원칙만은 불변하는 것이니 오늘날의 목민관들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정치인들과 일반 인사들도 교훈으로 삼아야 될 줄로 믿는다.
<목민심서> 원본은 순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문장이 난해하기 때문에 여간 한문에 소양이 있지 않고는 알아보기 어렵고 되어있다. 이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현대역으로 축조 번역하였으며 주해를 달아 누구든지 현대역과 원문을 대조해 가며 주해를 참조하면서 본다면 무난히 해독할 수 있으며 동시에 한문에 이해력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행열도(行列圖)
25세(世) | 대(大)O | 29세(世) | 해(海)O 순(淳)O |
33세(世) | 현(鉉)O 호(鎬)O |
26세(世) | O섭(燮) | 30세(世) | O영(榮) O식(植) |
34세(世) | O구(求) O수(洙) |
27세(世) | 규(奎)O | 31세(世) | 우(愚)O 희(憙)O |
35세(世) | 동(東)O 상(相)O |
28세(世) | O진(鎭) | 32세(世) | O배(培) O균(均) |
36세(世) | O걸(杰) O열(烈) |
여기서 우리와 다산 할아버지와는 어떤 가계도를 이루고 있는지 살펴보면
14世孫 충정공(忠靖公) 응두(應斗) 할아버지는 4분의 아드님을 두셨는데
첫째가 윤조(胤祚) 할아버지로 그 후손이 전첨공파 이고
둘째가 윤희(胤禧) 할아버지로 그 후손이 고암공파 이고
셋째가 윤우(胤祐) 할아버지로 그 후손이 초암공파 이고
넷째가 윤복(胤福) 할아버지로 그 후손이 도헌공파 로 4파로 분파되었다.
입밀양한 우리 정씨는 둘째 윤희할아버지의 후손으로 고암공파이고
다산 정약용 할아버지는 넷째 윤복할아버지의 후손으로 도헌공파에 속하고
나주 정씨의 23世孫이다.
<족보>
26대 | 27대 | 28대 | 29대 | 30대 | 31대 |
학섭 | 규혁 | 경진 | 해우 | 필영 | 희원,희고 |
수영 | 희덕 | ||||
구영 | 희욱,희열 | ||||
영식 | 희일 | ||||
창식 | 희호 | ||||
해욱 | 차영 | ||||
주영 | 유석 | ||||
기영 | |||||
원영 | |||||
해용 | 강식 | 휘재 | |||
태식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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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 | 동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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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철(해선) | 성영(탁길) | 소영,소찬 | |||
진영 | 남욱 | ||||
해성 | 실영(원식) | 희진,세욱 | |||
해종 | 명영 | 태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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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 | 원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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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 | 동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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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 | 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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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위 직계 및 제일 가까운쪽만 기재하였음 ***